어느덧 11월입니다. 곧 엄청나게 추워지겠지요?
낙엽이 물들고 고운 세상이 펼쳐질 아름다운 시기를 기념하며
예쁜 가을시 6가지를 소개합니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 이해인, 익어가는 가을
가을
나무들
엽서를 쓴다
나뭇가지
하늘에 푹 담갔다가
파란 물감을
찍어내어
나무들
옥수수
엽서를 날린다
아무도 없는
빈 뜨락에
나무들이
보내는
가을의 엽서
- 공재동, 낙엽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김현승, 가을의 기도
아-
별이다, 가을별
손에 잡힐 듯
저 위에서 흔들거린다, 수 천 수 만의 별이다
출렁대는 별이 눈물방울같다
생각이 그렇다
별이 우나보다,
풀벌레소리 귀를 울린다
진즉 울리고 있었거늘 지금에사 들려난다
무엇이 그리도 조급한 사연있어
어째서 그리도 수이 지는 겐지,
하도 짧은 가을이 섧은가보다
그렇다, 시간은 정지되는 게 낫다
님 기둘리는 순간의 설렘만
고이 간직한 채 멈추거라
님이 결국은 오지 않을 서러움이나
만나선 다시 헤어질지 모를 두려움이라면
싫다, 그건 싫다
기왕지사 아주 갈 요량이라면
차라리 이쯤에서 움직임 거두거라
가을울음이라도 실컷 울어보게끔
새가 운다
흐느끼는 것처럼 서러워 우는 걸 보니
필경 고향새다
가을밤 고향을 울던 그 새다
고향언덕에서 가을별 보며
밤마다 밤마다 많이도 울어대던
바로 그 새소리다,
가을이 운다
울어 그 볕에 깃드는 가을울음이다
- 림삼, 가을볕에 깃드는 가을울음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하늘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노을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 오기도 하고
단풍이
산기슭을 물들이면
붉어진 가슴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고독 같은 설렘이 번지겠지
아, 가을이여!
낙엽이 쏟아지고 철새가 떠나며
슬픈 허전함이 가득한 계절일지라도
네게서 묻어오는 느낌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뿐이네
-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정유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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